<탁본 이야기 > 묵향(墨香) 속에 만나는 선인(先人)들의 숨결...탁본(拓本)의 세계 (제4편)
5. 고아(高雅)한 취미, 격조(格調)높은 교양(敎養) ---탁본의 세계
탁본의 일차적인 기능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역사학 연구나 미술사 연구, 서도(書道)의
자료로서 그것을 활용하가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탁본은 고상한 미술품(美術品)으로서의 가치도 있는 것이어서...
집안에 오래 두고 감상(鑑賞) 하기 위한 장식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지금까지는 탁본의 과정을 소개하면서, 주로 그 작품성(作品性) 에 중점을 두어
아름다운 탁본을 만들기 위한 미술적(美術的)접근만을 강조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탁본의 진정한 가치는 그 외적 형상미(形象美)의 추구 못지않게
내용(內容 )속에 포함된 인간(人間) 의 향기... 주인공의 깊은 정신세계를 함께 음미(吟味)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점이 다른 분야에서 찾을 수 없는 뛰어난 매력(魅力)이 된다.
탁본은 ( 서예나 그림처럼 ) 오랜 세월을 연마해야 하는 어려운 기능이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취미이며, 적은 경비와 간단한 행장으로 훌쩍 길을
떠날 수 있는 부담없고 교양미있는 취미가 될 수 있다.
정성을 다해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은은한 먹 향기 속에 엣 선인(先人)들의 행적(行跡)이
떠오르게 되고, 어느 덧 그들의 생애와 사상(思想)의 세계에 함께 몰입(沒入) 하여,
그들과 함께 끝없는 대화(對話)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옛 것에 대한 가치를 소중히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우리 주변의 가까운 문화재부터 하나하나 관심을 기울인다면
삭막해져 가는 현대의 생활 속에서 향토문화에 대한 한 가닥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가져본다.
6. 탁본행각(行脚) 여록(餘錄)
필자가 처음 탁본을 배우기 시작한 때는, 갓 대학에 입학하였던 신입생 무렵이었다.
선배들을 따라 탁본에 참가하기 전날, 집에가서 먹을 갈아오라는 숙제와 함께 먹과 벼루
하나씩을 받았다.
선배들이 만들어 전시해 놓은 작품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멋진 탁본을 만들것이라 별렀건만,
그런 기대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애써 갈아온 먹물을 검사(檢査)해 본 선배는 근엄한 얼굴로 불합격 판정을 내렸고,
우리 일학년 풋내기들은 하릴없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손아귀가 얼얼하도록 먹물울
진국으로 갈아내야만 했다.
몇 달간의 잔심부름과 보조(補助) 역할을 거쳐...가을녘에 가서야 비로소 먹방망이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도 선배들이 먹을 치다기 망친 걸 실습용으로 이어받아...)
이후, 부지런히 쫓아다닌 끝에, 2학년 말경에는 드디어 도먹수(度墨手)(?)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대저 모든 취미가 다 그렇겠지만 , 탁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심취(甚醉) 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힘들고 고된일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댓가(代價)를 바란다면 도대체 얼마를 받아야 그 일을 할까?
시골 인심좋은 양반들의 고장에 탁본을 하러 가면, 대개 그 동네에 후손(後孫) 한두 분 쯤은
살고 있게 마련이다.
이런 분들은 대체로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곁에 나오셔서 이것저것 참견을 하시게 된다.
때로는 조상에 대한 자부심 넘친 설명과 함께, 정사(正史)에도 없는 구수한 야담(野談)을 들을
수도 있다.
어쩌다 시간이 남는 경우에는 아예 탁본 한 벌을 더 뽑아서 집에 소장하시라고 드리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에는 대개 극진(?) 한 막걸리 대접과 함께 며칠 묵어가며 푹 쉬고 가라는 ...
간곡한 청을 받게 된다.
탁본에 한창 빠져있던 시절, 겪었던 일화(逸話) 몇 토막을 소개하면서 졸고(拙稿)를 마치고자 한다.
ㄱ. 조 O O 신도비(神道碑)
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 O O 신도비를 채탁하러 갔을 때는, 꽃샘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이른 봄날이었다.
일행중 한 명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현장에 늦게 도착한 우리는 으레 그러하듯이 우선
관리인부터 찾았다.
그러나 비석 부근, 야트막한 언덕 밑에 있는 관리인의 집은 그날따라 비어있었고...
출타한 주인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집 앞에 할일없이 앉아 기다리던 우리들은 결국 그냥 작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초봄의 날씨는 퍽이나 사나웠고...바람이 세게 불었기 때문에 종이가 마르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서둘러 솔질을 한 다음 한창 먹을 치는 작업에 열중해 있을 때....... 기어코 사고가 터졌다.
언덕 아래로부터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오는 관리인...
손에는 길다란 지게작대기를 꼬나잡고, 당장에라도 후려칠 듯한 기세로 그는 외쳤다.
" 어떤 놈들인데 우리 조상 비석에다 먹칠을 하는 게야? "
결국 그날 우린, 작업을 끝내지 못한 채 쫒겨나야 했다.
(비석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빌듯이 설득했지만, 낮술에 만취한 그는 막무가내로 작대기를
휘둘렀고......)
--- 탁본 이야기 ..... 다음편이 마지막편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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